내가 생산대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군(军) 대표가 우리를 집합시켰다. 그는 목소리와 얼굴빛이 격앙되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은 입만 열면 모주석을 보위해야 한다고 떠들면서, 지금 되레 모주석이 너희를 보위하시고 있지 않냐 말이야. 거기다 홍색 강산(红包江山: 공산주의 정권)까지도 보위하시고....."
그런 다음, 우리에게 임표(林彪: 중국군 원수. 문혁 기간 중, 반혁명 혐의를 받고, 소련으로 망명하려다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함) 사건을 전달했다. 덧붙여, 우리에게 행인 검문을 주의하라고 했다.(우리는 국경 지대에 있었다)
해산한 후, 나는 한참 동안 마음이 불쾌했다. ---- 나도 모든 동갑쟁이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모주석을 보위하겠다고 맹세하는 구호를 외치기는 했다. 하지만, 군 대표는 당연히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또 군인이니까 이 사건의, 한 편에서 책임이 훨씬 클 것이다. 또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지청(知靑) 아이들로서는 담당할 수도 없는 큰 사간인데, 사건이 터졌다 해서 우리에게 먼저 고함을 쳐대다니! 이건 군 대표가 정치 경험이 노련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 일들은 이미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줄 곳 나를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내가 이렇게 믿을 수 없는 ---- 내가 내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변덕 심한 소인배란 말인가?
모주석을 보위하겠다고 말했지만, 결과는 모주석을 보위하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엄격할 것을 요구했었고, 최소한 젊었을 때라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반성을 거쳐, 나는 이 사건에 대해서, 무능하고,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령 당초에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적극적인 결론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고, 현재 하나 찾았다.
만약 우리가 신의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일을 할 때, 시종일관 그렇게 해야 하며, 여기에 건전한 이성(理性)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된다.
이성(理性)과 관련해서, 철학자들은 많은 토론을 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것의 관건은"모든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지 말라" 하는 것이다.
외할머니가 그때 한 묘(亩)에서 모두들 삼십만 근의 식량이 나온다고 했을 때, 했던 태도처럼, 이성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점에서, 어느 때 그렇게 하기 힘든다면, 그건 비관과 소극 때문에 야기된 것이다. 그래서 이성과 낙관, 이 두 가지 본보기에서 이성을 선택하기 매우 어렵게 했다.
이성(理性)은 정조(贞操) 같은 것이다. 잃어버리면, 다시 가질 수 없다.
오직 우연히 기분 좋은 일을 만났을 때, 낙관은 되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점에 주목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잘못된 전제에서는, 무엇이나 추론해 낼 수 있다.
실제로 보면, 거짓말하는 사람은 무엇이든 다 엮을 수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성을 잃는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많은 일을 당하게 되고,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길을 잃고, 난관에 처할 것이다.
만약, 임표(林彪) 사건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정말 모주석을 보위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는 최소한, 낙관과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적어도 생산대에 들어갈 때는 그랬다.
이어서, 어느 날 중병을 앓게 되었다. 거기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게 되니, 명이 경각에 달 렸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도시에 가서 병을 치료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지도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정신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시의 기분은 매우 슬펐지만, 나는 사람이 병이 들면 다 그러려니 여겼다.
구(旧) 판, 수호전(水浒传)에서, 이규가 모친을 마중하러 양산박을 내려갔는데, 길에서 뜻밖에, 노모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그는 양산박 산채로 돌아와 송강에게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책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송강이 크게 웃었다".
여기서 송강이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김성탄(金圣叹 : 明 말기 문학비평가)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문구를 "이규가 대성통곡했다"로 고쳐 썼다.
나도 김성탄의 의견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불행한 일을 만나면, 슬퍼하는 게 당연하지, 어찌 아무 때나 하루 종일, 멍청하게 하하 웃겠는가?
당시의 상황은 이렇다. 설령 형세가 하나같이 잘 돌아가도(이점은 현재 의문투성이지만), 내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나는 저절로 슬플 이유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니, 조금 생뚱맞은 것 같아, 연유를 설명한다.
슬픈 마음으로 나는 도시로 돌아가 병을 치료하겠다고 신청했으나, 지도자는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는 나를 기쁘게 한다고, "크게 좋아질 형세만 많이 생각하라"라고 했다.
지금 상황을 떠올리면 이렇다. "사인방(四人帮)"이 시대에 역행해서, 국민경제는 불원간 붕괴될 판이고, 나 개인은 또 목숨이 간들간들하니, 차라리 슬퍼 하머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해에 그 정도로 슬퍼하는 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은, 가장하는 게 아니라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기쁨을 함께 나누거나, 그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은, 이래라저래라 명령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의 천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사람은 나귀와 말을 교배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두 종류, 동물의 천성에 위배되는 일이다. 그 결과 노새가 태어나지만 노새는 생식력이 없다. 이것은 천성에 위배된 일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 개인의 한 가지 비밀은, 극도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필요한 군중집회에서, 나는 이런 기쁨과 슬픔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수준에 못 미쳤다는 것이다.
1968년 국경절 때, 나는 한 떼의 학교 친구들과 금수교(북경 천안문 앞 유적지)에 갔다. 다른 사람은 환호작약하며, 행복한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보충해서 말하자면, 내가 남성으로서, 혼절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혼절해 버렸으니, 이것이 더욱 나의 불행을 가중시킨 것이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그 당시 표준에 따르자면, 나는 본심이 착했고, 긍정적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아 것은 바로 "충성(忠)" 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일을 솔직하게 말할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모(毛) 주석(모택동), 그 노인네가 나를 알았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17세, 중학생의 여러 가지 걱정 거리는, 내 뇌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 하든 해버려, 마지 못해 하지 말고."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주요 원인은 아마 내가 다른 사람이 이런 나의 비겁한 마음을 알까 봐 두려워, 깊이 감췄기 때문에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긴장해서 살았다.
서양인들이 말하기를 사람들 옷장 속에는 해골이 하나씩 있다고 한다. 나의 해골은 바로 나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
나는 내가 배우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은, 꿈속에서 말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다. 이건 당연히 에둘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말하는 것이다.
감정 문제와 관련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방면에서 우리는 적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크게 키우면 안 된다.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웃어야 한다.
만약, 누가 내 봉급을 깎더라도, 나는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우파(右派)라고 공격한다면,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는 것이 맞다.
다른 사람이 이 방면에서, 나보다 강하다면, 감탄이야 하겠지만, 나도 그의 정도에 이르렀다고 자랑삼아 말할 것은 없다.
우리는 상급자를 속여서 그들을 오도하면 안 된다. 이것은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참고: 임표(林彪)
중국군 3대 원수(元帥), 중국 공신당 부주석. 모택동이 등소평과 함께 후계자로 점찍었던 인물.
약력.
1907. 후베이성 황강 출생
1925. 공산당 입당
1926. 황포 군관학교 입학 (당시 교관, 주은래)
1927. 홍군 4군 단장
1934~35. 대장정 참가
1937. 팔로군 115사단장 (평형관에서 관동군 격파)
중국 공신당 정치국 이인자로 부상
1967. 모택동과 문화 대혁명 주도
1971. 모택동 암살 계획 실패로 소련 망명 기도 중, 내몽골에서 비행기 추락 사망
*정말 모택동을 암살하려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현재 조용히 복권이 진행되고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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