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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대로 산 돼지

<적동단주>를 생각한다 :从<赤彤丹朱>想到的 : 1/2

 

장 캉캉(张抗抗: 1950년생, 항주 출신 여성 작가)의 <적동단주>를 대충 읽어보니, 유르스나르(프랑스 여성 작가)의 <경건한 추억>과 <북방 파일>이 생각났다.

이 몇 권의 책들은 대체로 같은 수법이다. 나는 비록 유르스나르의 열렬한 숭배자지만, <북방 파일>은 전혀 좋아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총알 한방이면 온갖 근심이 해결된다> <동방의 기이한 풍경>이다. 만약 유르스나르가 <경건한 추억> <북방 파일>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녀에 대한 내 느낌은 조금 더 좋았을 것이다.

그 주요한 이유는, 나는 유르스나르를 소설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소설을 쓰기 바라고, 그녀가 역사 혹은 현장의 기록 같은 것들을 쓰지 않기 바란다.

당연히 나는 역사나 현장의 기록을 쓰는 것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무엇이나 잘 쓰기만 한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캉캉의 책을 이전에는 읽어보지 않았고, 그녀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든 내 개인적 판단에 따르자면 <적동단주>는 소설 류에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어쩌면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1940년대 츠바이크(1881~1942: 오스트리아의 사실주의 작가)는 원망스럽게 말했다.

"과거의 소설은 정확하고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나도 그의 원망에 찬성하지만, 그 자신의 소설도 역시 정확하고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후에 많은 정확하고 적절한 소설이 출현했는데, 예를 들어 이태리 칼비노의 작품, 그리고 프랑스의 "신소설(앙띠로망)"같은 것이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그것들을 "너무 융통성 없는 문학, 재미없는 문학"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  소설은 언어의 구조이며, 어느 부분이든지 결함이 없어야 한다.

이런 방향으로 노력하면, 소설은 비로소 역사, 사실, 통속문학과 갈라지게 된다. 연극이나 철학 같은 것은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문체와는 전혀 다르며, 그래야 맞다.

이건 당연히 내 개인의 생각일 뿐이고, 여기서 통용되는 기준에 따르면, <적동단주>는 역시 소설이며, 소설 중에서도 비교적 고전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나는, 근 3~40년간 소설 예술은 큰 진보를 했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고전이란 당연히 부정적 의미의 말이다.

유르스나르의 몇몇 소설은 현대적 기준에 도달해있고, 그것들은 그녀의 제일 좋은 작품들이다. 또한 몇몇"고전"의 기준에 이른 작품들은 앞에서의 좋은 점이 없다.

나는 오히려 장 캉캉이 <적동단주>를 제외하고, 여전히 다른 유의 소설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경건한 추억> <북방 파일>을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지만, 나는 유르스나르가 이 두 권의 소설을 쓰게 된 출발점을 알고 있다.

인텔리와 중생들은 다르다.

인텔리는 현시점, 현세를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의 시간대를 살아간다.

인문 인텔리는 역사를 잘 이해하니,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대를 살아가며, 과학 인텔리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현재에서 미래에 이르는 시간대를 살아간다.

만약 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과학 기술과 인문 양쪽의 과학 훈련을 받았으니 아마 모두들 나의 독단을 넓게 이해해 줄 것 같다.

어떤 인텔리든지 대중들과 구별되며, 그래서 인텔리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두 권의 책에서, 유르스나르는 그녀의 이런 생각을 구현해 놓았다. 그렇더라도 나는 여전히 이 두 권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유르스나르를 숭배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내심 고통스럽다.

<적동단주>에 이르면, 나는 더욱 싫다.

내가 이 말을 하는데 훨씬 큰 고통을 받는다는 걸 믿어주기 바란다.

나도 소설을 쓰고, 게다가 가혹한 비평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다행히도 장 캉캉을 위로해 줄 말은 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