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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대로 산 돼지

<대가론>, 유토피아와 성현(<代价论>乌拖邦与圣贤)

토마스 모어 초상화 및 유토피아를 그린 목판화

정예푸(郑也夫: 1950년 8월 북경 출생, 한족, 북경대 사회학과 교수)의 <대가론(代价论)>이 하버드 옌징 총서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매우 오랫동안 손 닿는 데 있었는데도, 막상 읽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 나는, 만일 책  한 권 읽을 정력도 없다면, 그건 책을 쓴 작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와서야, 자세히 정독했는데, 정예푸 선생의 글은 거침이 없었고, 책을 많이 읽어 갈수록,  문헌 자료도 충분히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에 관하여 논하자면, 이 책은 대단히 좋은 책이다. 하지만, 책에 들어있는 사상을 말하자면, 상당히 내 생각에 저촉된다고 생각한다.

말하기 쑥스럽지만, 내 처는 사회학자고, 나도 사회과학 연구 일을 했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몇몇 사회 과학자의 사상에 점점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이 책의 주지(主旨)는 주로 중용(中庸) 사상을 널리 알리고, 또한 그 철학을 밝히고자 하는 데 있다.

그 철학이란, 어떤 사회 윤리도 모두,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어떤 일을 할 때도 언제나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대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생각 들은 훌륭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어떤 문제들은 기술적인 문제로 간주하는 것이, 원칙적인 문제로 보는 것보다 훨씬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이 유리한 효과를 추구할 때, 어떤 얼마간 불리한 영향도 더불어 발생하는데, 이것은 공정상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일일뿐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묘사하고 해결하는 수학 공구  ----  환언하면, 만약 외곬으로 근대 과학의 분석방법을 배척하러 든다면, 자연히 많은 원칙을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원칙들은 워낙 가져다 쓰고 있는 데가 많아서 매우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중용사상이 단지 감각에만 의존해 일을 하는 옛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다면, 유용한데 ---- 예를 들어 그가 만두를 찌려고 할 때, 중용(中庸: 적당히) 이란 두 글자를 기억한다면, 소다를 적게 쳐서 시큼한 맛이 나게 하거나 혹은 소다를 너무 많이 쳐서 떫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근대의 화공 기사는 중용의 원칙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그는  PH도를 측정하고, 저울로 소다의 분량만 재면 된다.

요컨대, 나는 중용사상이 어떤 고명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렇게 분석 방법만 맹신하는 것도 하나의 편견이 될 수 있다.

나는 사회학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서구인이 발명한 분석 방법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 앞으로는 우리도 중국인이 발명한 정합(整合:조정하여 일치시킨) 방법으로 연구해야 한다."

또 여권(女权) 주의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들었다.

"남자들이 발명한 이성적인 방법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다. 이제 우리는 감성적 방법으로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연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ㅣ

<대가론>은 장(章) 별로 많은 사회학 테마를 토론하는데, 어떤 문제들은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서 내가 평론하기 버겁다. 하지만 어떤 장에서는 유토피아를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흥미가 있다.

"유토피아", 이 이름은 토머스 모어의 동명 소설에서 유래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 제목으로서 독특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면의 유토피아가 있고, 부정적인 면의 유토피아가 있는데, 나중에 말한 제재가 생명력이 훨씬 왕성하다.

하나의 제도로서, 그것은 매우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결국, 하나의 극단적인 국가주의 제도로서 개인을 억압한다.

둘째로, 그것은 경직되어, 생명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딱딱한 생활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거기서의 생활은 틀림없이 재미가 없어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근대 사상가는 그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했고, 저자 정 선생도 인용했다.

하지만 그는 유토피아는 사람들의 향상을 격려할 수 있고, 모두를 활기 있게 만드는 신선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앞사람들이 범한 하나의 착오이다.

어떤 유토피아도 결국, 한 개인의 머리로 상상한, 하나의 인류 사회이다. 그것은 가상의 정치제도, 의식 형태, 생활방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인류 사회는 결코 아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의 소설로 끝난다면, 거기서 더 말할 건 없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을 모두 그 안에서 살게 할 작정이라면, 지극히 난폭하며, 방자하고 오만한 생각이다.

현세의 독재자가 하는 오만 방자한 생각은, 자기 머리가 천하 창생을 대신한다는 사상 아닌 것이 없다. 유토피아를 창설한 자 역시, 자기가 생각해 낸 한차례 사상으로  천추만대의 후세 사람들 사상을 대체시키려는 것으로 만약 후세 사람들이 어리석은 바보로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도 성공이 불가능하다.

현대 사회의 실천에서,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사회가 필요치 않고, 약간 살아갈만 사회가 필요한데 그것도 억만 명의 지혜로 추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유토피아를 생각해 내고, 더해서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착오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향상을 격려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미, 유토피아가 고무한 신선함이란, 아쉽게도 오직  일종의 특수한 어리석음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하였다.

정예푸의 <대가론>에서 유토피아까지 충분히 이야기했다.

다음으로 나는 성현을 신상을 말하려고 한다. 이것과 정 선생의 책은 아무 관계도 없다.

유토피아를 싫어하는 사람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찾으니, 플라톤과 그의 <이상 국가(理想国)>를 찾아내었고, 그런 다음 그를 향해 맹렬한 공격이 불을 뿜었다.

중국 자유파 쪽에서도 공격 대상을 찾았고, 여러 가지 부자유스러운 나쁜 예를 만들어낸 원흉이라고 하였다.

그때, 그 장소였다면, 나 역시 감히 자유 파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이런 공격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러셀 선생은 플라톤을 공격하는 것은, '플라톤이 나쁜 예를 만들었다고 하는 죄명을 씌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대(代), 한 대의 청년들이 <이상 국가>를 읽으면, 가슴속에 높은 웅지가 불타오르며, 라이 쿠르 코스(Lycurgus: 스파르타의 기초를 다진 정치가) 혹은 철인 왕(哲人王)이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애석하게도 권세에 대한 집착은 결국 그들을 잘 못된 길로 이끌 것이다".

이 말을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결국  이상 국가의 애호자는 권세에 집착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아마 부당한 질책도 아닐 것이다. 라이 쿠르 코스는 그렇다 치고, 철인 왕은 또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