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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주오(暂坐)> 후기(后记) 贾平凹. 2/2 (完)

여주 강천 섬의 ㅜ가을 (2024.10.29)

 

<잔주오>에서도 여전히 삶의 소소한 근심 걱정이 있다. 이것은 나의 일관된 소설 작법(作法)이다.

이 소설이 이전 소설과 다른 것은 이번에는 등장인물들이 훨씬 말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말로써 회의를 열기도 하고, 보고를 하기도 하고, 지시나 당부를 하기도 하고, 하소연이나 논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것이다.

중생들이 말하면 그것이 바로 속세이고, 거기에서 관세음보살 (觀世音菩薩: 불교에서 아미타불의 왼편에서 교화를 돕는 보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이 생겨난다.

관세음보살이 보는 것은 끝없이 광활한  세상의 모든 안과 밖의 여러 소리이다.

그래서  <묘법연화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늘의 귀는 갖지 못했어도, 부모에게 받은 보통 귀로도 항상 들을 주 있다. 적어도 무수한  종류의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익숙해져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잔주오>에는 비록 "나"가 없지만, 나는 바로 찻집 위에 있다.

그것은 제비가 인간과 떨어져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며, 둥지를 집 대들보에 지어서 모든 삼라만상을 아래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자매들이 말하는, 자신의 일, 다른 사람의 일, 사회적인 문제, 다른 사람이 그녀들을 두고 하는 말을 들으면, 혹독한 시련, 어두음과 밝음의 세월, 먹고 마시고 싸는 생존 이야기, 눈앞의 현실 생활 이야기에 생사이별, 희로애락이 모두 있다.

모든 생활에는 생사 이별의 고통이 다시 되풀이되는 괴로움이 있다. 이어지는 시공(時空)이 회전하는 과정에서, 선악(善惡) 행위는 여러 가지 환경과 생명의 인과응보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중생을 우주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중생의 모습이 바로 문학이며, 이 중생의 모습을 글로 씀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이 세상의 "식견"이 생겨나게 된다. "식견" 역시 문학의 의미이고, 철리(哲理)이며 시(詩)의 바탕이다.

이런 말들을 쓸 때, 너는 어떻게 말하고, 나는 어떻게 말하고, 너는 이렇게 한마디, 나는 저렇게 한마디 할 수 있으니, 나는 아예 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썼는데, 이건 분명 다소 어리석은 짓 같다. 의도된 변이나 황당함이 없고, 화려한 장식이나 과장이 없으면, 어쩌면 어떤 사람은 몇 페이지 들척여 보고는 바로 돌아 앉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기어이 그렇게 서술했다.

이 시대에 시야가 넓지 않고, 유행을 따르려는  의식이  없다면 소설을 쓰기 힘들다.

이런 이치는 작가들이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자신을 토속적인 것에서 현실주의자로 변화시켜 왔다.

현실주의를 이해할수록, 초현실주의를 이해하게 되고, 초현실주의를 이해할수록 현실주의를 이해하게 된다.

현실주의는 문학의 긴 강이며, 이 문학의 긴 강에는 상류, 중류, 하류가 있고, 또한 만(湾:  물굽이), 탄(瘫:여울), 담(潭: 구덩이) 그리고 협곡과 나루터가 있다.

초현실주의는 생활의 미망(어리둥절함), 회의, 반역, 탈출의 문학 표현이다.

이런 미망, 회의, 반역, 탈출은 우리가 처한 시대의 사회적 환경이 원인이 되고, 무엇보다 생명이, 그리고 생명청춘 단계가 원인이 된다.

이런 말들을 처리하려면, 편안하고, 우직하고, 용감하고, 어색하게 허세를 부려야 한다. 

나는 긍정적이고 능력도 있으며, 또 오랫동안 이런 느낌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힘닿는 대로, 일체의 초현실주의 요소들을 흡수하여 나를 풍부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국민정서에 부합하게 하고, 남과 비교해 가며 작품을 썼다.

시야(视野)는 기량(器量)을 결정하며, 기량이 크면 어떻게 사물을 보든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소설을 썼지만, 어쨌든 한 권 한 권은 달라야 한다.

풍격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풍격을 지탱시켜 주는 것은 오직 풍골(风骨: 강력한 풍격)이다.

<잔주오>는 장대높이 뛰기를 시도하는 것이나 같다. 일 센티 일 센티 높이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의 돌파는 매번 실패를 지표로 삼아야 한다.

러시아 미녀 장대높이뛰기 선수 이신바예바는 적당히 물러서지 않고 계속 실패를 돌파했다.

제백석 (중국의 저명한 화가)은 말년의 회화에 낙관을 찍을 때 꼭 팔십몇 세 혹은 구십몇세 라고 썼다

그것은 일종의 깔끔함 일까, 아니면 일종의 차랑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잔주오>에서 순전히 한 무리의 여성들에 대해서만 썼기 때문에 실제로 잘 써질지는 자신이 없었다.

작품을 써 내려가면서, 자주 내가 그녀들을 쓰는 게 아니라, 그녀들이 나를 썼다. 이런 모순과 분열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을 쓰면서, 나를 괴롭힌 것은 "여성들은 연애에 빠지기 쉬운데, 왜 그녀들은 모두 결혼하지 않거나, 이혼 후 다시 결혼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었다.

세상일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데,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을 리 있을까?

이런 말도 떠올랐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느니, 네가 나를 사랑한다느니 하지 마라.

우리 모두는 단지 배고픈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의심한다.

이 도시가 겨울과 봄, 내내 스모그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하늘이 가득 차 있는 것 아닐까?

 

 

 

 

2019년 9월 13일. 중추절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