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상태를 벗어나자 (摆脱董稚状态) : 3/4
개혁 개방 초기에, 너에 화링(聂华岺 :1925. 우한 출생 여성작가)과 앵그르 부부가 중국에 와서 당시의 원로 작가들을 방문하였다.
앵그르는 회견을 할 때 물었다.
" 당신네, 중국 작품 중에는 어째서 성(性)에 대해 쓴 것이 없는 거요? 성은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
우리나라 원로 작가 한 분이 대답했다. "우리 중국인들은 성(性)에 별 흥미가 없소!" 이건 당연히 서양인을 속이는 말로 실제 상황은 이와 거리가 멀다. 하지만 서양인은 속아 넘어가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당신들 중국인들도 아이들이 많지 않소? 그건 어째서 그런 거요?"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아이들을 코를 틀어쥐고 억지로 낳은 것도 아니고, 구역질 나는 것을 참으면서 낳은 것이 리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쓴 약을 먹듯, 이일을 하였죠'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성은 중국인의 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성생활을 즐기는 것은 외국인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니 이 방면에서 농간을 부릴 필요는 조금도 없다.
기왕 그렇게 중요하니고 하니, 지연스럽게 바로 토론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전 문학이라도 성을 회피할 수는 없고, 사회학과 인류학은 그것을 연구해야 하고, 예술 영상은 그걸 표현해야 한다. 성(性)은 과학과 예술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가 이 방면을 속박하려 했다. 문제는 성 환경을 속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 환경까지 문제가 된 것이다.
<성 사회학> 책에는 1920년대 미국이 어떻게 음란 서적을 판결했는지에 대해 묘사했다.
검열관은 대작 중에서 한 대목을 잡아내어, 배심원들 앞에서 읽는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말한다. "설마 당신들은, 당신 이이들에게 이런 책을 읽게 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 결과, 헤밍웨이, 로렌스, 조이스가 이란 식으로 출판 금지되어 버렸다. 우리나라에도 현재 헤밍웨이같이 위대한 작가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만약에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작품을 발표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고뇌스러울 것이다. 헤밍웨이가 과연 검열관들 마음에 들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나 본인도 작가다. 어느 작가든, 책이 출판되고 나서, 누구에게 팔려나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통제한단 말인가?
만약, 고전 작가가 성(性)을 쓰면서, 자기 본심은 선정적이지도 않고, 세상에 영합하지도 않고, 오직 생활의 진실을 추구하려고 했다고 하자. 하지만 출간된 후에 그 책이 어떤 남자 애 손에 들어가, 수음하기 전 성충동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한다면, 어느 누가 그걸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 때문에, 사회는 작가에 대해 판결하기를, 그런 남자 애의 존재가 있으니 너의 책은 나오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이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런 일이 별로 억울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그보다 훨씬 억울할 것이다.
사실상, 사회는 고전 작가, 전업작가들에게도 자기들의 독자가 16세 남자아이라고 상상할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이 남자 이이는 드러내려 하지 않고, 언제나 나쁜 짓을 배우려고 하는 그런 아이이다.
나, 본인은 독자이기도 하다. 나는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전공 서적을 읽어야 하고, 거기다 고전문학 서적을 읽기 좋아한다. 하지만 시장에는 기껏 72개 이야기의 <열흘 이야기>, 요약본<금병매>, 그리고 내용을 하도 축약해서 지리멸렬한 레마르크, 그밖에 몇몇 성심리학자, 성 사회학자들의 책들밖에 없다.
예의 차리지 않고 말하자면,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은 정말 엉터리이다.
며칠 전 푸코(프랑스 철학자)의 <성의 역사>를 샀다. 한데 어찌나 삭제를 심하게 했는지 아무리 읽어봐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지금 검열이 안된 영문판으로 다시 볼 생각 중이다.
이런 상황은 나에게는 큰 손해다. 여기서 내가 조금도 겸허하지 않게 말하면, 나는 고차원적인 독자다. 하지만 책 검열관은 나를 16세의 아이로 대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