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형 소설에 관하여 (关于幽闭型小说)

장아이링(张爱玲: 1920~1995 :중국 현대 작가, 주로 상하이 홍콩 등의 상류사회 이야기에서 소재를 취함)의 소설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 그녀의 여성의 생활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다는 것이다.
중국의 나이 많은 여인 중 일부는, 젊은 여인을 대할 때, 자기가 낳은 딸이 아니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고생을 시키려고 한다. 며느리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일을 시키면서, 잠시도 쉴 틈을 안 주고, 일을 다 마치면 또 일을 잘 못했다고 나무란다.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잔소리를 해대고, 말도 비수로 찌르는 것 같은 말만 한다.---- 바람과 그림자를 잡아 오라느니,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하는 그런 식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이런 생활로 돌아간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통사회의 여인들은 모두 이런 삶을 견디고 살았다.
많은 세월을 며느리로 시달리며 살다가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이 여인은 표변해서, 과거의 시어머니와 똑같이 며느리를 구박한다.
장아이링은 이런 생활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매우 현실적으로 소설을 썼다.
하지만, 양심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은 고통도 쓸 수 있고, 절망도 쓸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일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 나니, 답답하지 않았던 사람이 답답해지고, 답답했던 사람은 더욱 답답해지는 이 일은, 대다수 중국인들에게 가장 큰 고난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정 정도의 답답함은 답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 그 역시 "괴롭힘이 만든 시어머니" 가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여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있다. 또 중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있다.
내가 쓴, 항해 생활을 묘사한 이야기들에서 이런 유의 일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구박하는 사람이 시어머니가 아니라 갑판장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마크 트웨인이 쓴 것과도 비슷하다.
어떤 악질 갑판장이 있었는데, 하루 종일 수하 선원들에게 갑판 청소, 유리창 닦기, 돛대 청소 등을 하라고 닦달했다. 위생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갑판을 하루에 이십 차례나 닦으라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선원들이 그에게 모두 깨끗이 닦았다고 보고했다. 그가 갑판에 올라가 자세히 보았지만 모든 곳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고 흠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닻을 닦으라고 명령했다. 온종일 이렇게 닦다 보니 선원들이 짜증이 났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어찌해 볼 도리기가 없었다. 사방이 망망대해인데, 당장 그만두겠다고 할 수도 없고, 부두에 닿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중국의 구식 가정은 여인들에게 있어 항해 중인 배이다. 그것도 영원히 부두에 닿지 않는 배다. 짜증을 내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중국 구식 여인들은 자살(自杀)이라는 것에 대하여 비교적 익숙하다. 여기서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생긴 배경에는 언제나 봉쇄된 곳이 있고, 사람들은 거기서 생명을 낭비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폐쇄 공포증의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이 글의 요지는 장아이링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항해 소설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폐쇄, 억압된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가정도 좋고, 배(船)도 좋지만, 개인으로서 너무나 즙은 감방이고, 인류로서는 너무나 작은 악몽이다. 보다 큰 악몽은 사회이다. 보다 분명히 말하면 인류문화의 생존 환경이다.
만약 한 사회가 장시간 진보하지 않고, 생활도 발전하지 않는다면 어떤 새로운 사상도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텔리에게 바로 하나의 악몽일 것이다.
이 악몽이 문학에서 표현되었다. 이것은 바로 중국문학의 하나의 전통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것은, 중국인이 하늘은 변치 않고, 도(道)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생활하다가 초조함을 느낄 때, 심각한 허무감에 빠지게 된다. 이 방면에서 제일 좋은 예는 명청(明清) 시대의 필기소설(笔记小说: 소품 형식으로 쓴 소설)이며, 장아이링의 소설 역시 이런 맛이 난다.
근심하며 슬퍼하면서도, 분노하지 않는다. 절망하면서도 원한도 없다.
이건 어찌 보면, 죽기 직전의 사람이 쓴 것이다.
내가 처음 장아이링의 작품을 읽었을 때는 미국에서였다. 나는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중국에 돌아와, 당대 청년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보니, 모두 이런 느낌이 났다.
이때 나는 생각했다. 어쩜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소위 폐쇄형 소설이란 이런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감방과 악몽이 전부라고 여기고 글을 쓰는 것이다.
며느리가 되어 답답해하거나, 혹은 시어머니가 되어 사람을 괴롭히거나, 혹은 뉘우치고 후회하거나, 실의에 빠져 고독해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행한 가운데 글의 등급이 매겨진다.
나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원래 이과(理科) 공부를 했다. 이과를 공부한 사람은 파괴할 수 없는 감방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더욱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인생에서 유일한 불행은 바로 자기의 무능이다.
예를 들어, 수학자에 대하여 말한다면, 페르마(1601~1665: 프랑스 수학자)의 정리를 증명하기만 하면, 바로 전 세계 수학자의 숭앙을 받고, 자기 자신도 큰 기쁨을 느낄 것이다. 문제는 그걸 증명해내지 못하는 데 있을 뿐이다.
물리학자의 경우, 상온에서의 핵융합 방법을 찾아낸다면 즉시 행복의 느낌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오직 그걸 찾아내지 못할 뿐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필사적으로 문제를 연구해라. 그것이 너의 구세주이다."
이런 신념을 가슴에 품고, 나는 문학에 뛰어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회사의 부정한 일을 쓰고, 불유쾌한 인간관계의 충돌을 쓰는 것 만이 유일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같은 작품도 쓸 수 있고, 칼비노의 < 우리들의 조상 > 같은 소설도 쓸 수 있다. 문학도 과학 같을 수 있는 것이고, 무궁한 영역이 될 수 있으며, 사람은 그 안에서 용솟음치는 상상력에 뛰어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이건 유치한 생각이었다. 나 스스로 이런 소설들을 써 보니, 그중에는 항해하는 배도 없었고 감방도 없었으며, 오직 그런 것 외의 일만 있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소설들은 현재 편집자의 손에 잡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편집자는 존재론의 어투로 말한다.
그는 어디서 왔는가? 그는 누구인가? 그는 도대체 무얼 썼는가?